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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洪潤基 敎授의 日本文化史 2008/01/29 16: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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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潤基 敎授의 日本文化史

                                         百濟 王家에서 支配한 日本王室(3)

                                                                                                                                           洪 潤 基

平野神이 百濟 聖王이라고 하는 史實을 우리는 『袋草子』의 “平野御哥”를 통해서 거듭 確認할 수 있다. 그런데 1158년에 처음으로 『袋草子』가 著述된지 약 5백여년이 지난 後인 1684(貞亨2)년에 옛날의 『袋草子』를 보고 쓴 傳本이 나왔다. 그런데 이 傳本 『袋草子』 제4권에 실린 “‘平野御哥”에 관한 解說文을 읽어보면 더욱 놀라운 事實이 記述되어 있다. 卽 1648(慶安元年)년에 淸尋이 『袋草子』를 베껴 筆寫했다는 이 책에 실린 “平野御哥”의 解說文은 다음과 같다.
“今案白壁ハ光仁天皇也其曾祖父ハ舒明天皇其曾祖父ハ欽明天皇也是平野明神云了”
“지금 생각건대 白壁는 光仁天皇 이며, 그 曾祖父는 舒明天皇이고, 그의 曾祖父는 欽明天皇이니라, 이것을 平野明神이라고 말함을 깨달으라”

그렇다면 일단 “平野御哥”의 解說文이 내세우고 있는 光仁天皇 윗대의 王統 直系家譜를 우선 차례대로 欽明天皇 當代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1) 欽明天皇(서기538년에 百濟 聖王이 倭國에 불교 포교함. 『日本書紀』는 552년說 )
(2) 敏澾天皇(百濟大井宮을 세움, 「新撰姓氏綠」에 百濟 王族으로 明示됨)
(3) 押坂彦人大兄皇子
(4) 舒明天皇(몸소 勅命을 내려 百濟川 지역에다 百濟宮을 세웠고, 逝去했을 때는 「百濟大殯」이라고 하는 百濟王室의 三年喪 葬禮를 지냄)
(5) 天智天皇(662년 8․27, 백제 白村江으로 간 日本 援軍 27,000명 전멸. 667년에 近江땅으로 遷都함)
(6) 施基皇子
(7) 光仁天皇(百濟 武寧王의 직계 後孫인 高野<和>新笠皇太后의 남편)
(8) 桓武天皇(平安京 遷都, 百濟 聖王의 祠堂으로서 平野神社를 세움. 새로운 王都 平安京 안에는 宮內에다 韓國神 세분을 祭祀모시는 園神社와 韓神社를 세움)
“平野神은 百濟 聖王의 神位”라는 것이 日本의 權威 學者들의 연구 결과이다. 그런데 1648년에 쓴 『袋草子』 筆寫本의 解說文에서는 “平野神은 欽明天皇의 神位”라고 주장했다. 이 두가지 見解는 史實上 一致하고 있다. 卽 百濟 聖王은 日本의 欽明天皇과 同一 人物이라는 점이다. 百濟 聖王은 百濟王인 同時에 그 당시 倭國의 欽明王을 兼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좀더 具體的으로 (7) 光仁天皇의 直系 윗대의 王家 系譜上의 人物들의 正體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들의 발자취가 百濟 王族들이라는 것은 『日本書紀』의 記事를 통해서도 쉽사리 들어나고 있으나, 지금까지 누구도 그 具體的인 歷史 事項들을 정리한 일이 없기에, 필자가 그 內容을 처음으로 要約하기로 한다.
(1)欽明천황 (539~571 재위)은 서기 539년에 卽位한 것으로 『日本書紀』가 엮고 있다. 그러나 일부 권위 사학자 靑木和夫․石母田正 씨등 52명이 함께 편집․집필한 『日本史年表』(日本歷史學硏究會 編․岩波書店, 1968)에 依하면 欽明천황의 卽位年은 서기 532년이다. 즉 『日本書紀』보다 7년 윗대에 이미 卽位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서기538년에 百濟 聖王이 倭國에 佛像과 經論을 보내와 倭國에 佛敎가 正式으로 傳해졌다고 밝히고 있다. 즉 『日本書紀』는 欽明王의 卽位年을 자그마치 7년이나 뒤로 밀어 내렸으며, 百濟 佛敎의 日本 布敎도 14년이나 뒤쪽으로 끌어내린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2) 敏達천황(572~585 재위)은 『日本書紀』에서는 ‘百濟大井宮’을 세운 것을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할 事項은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王室 族譜인 『新撰姓氏綠』(815)이라는 王室의 氏族分類本(皇別,神別,諸蕃)에서 보면 제30대 王인 “敏達天皇은 百濟 王族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大原眞人”이라는 日本 王族의 出身成分이 기술된 『新撰姓氏錄』의 項目을 보면 다음과 같은 記事가 뚜렷하다.

「大原眞人,出自諡敏澾孫百濟王也」

이와 같이 “大原眞人은 그 出身이 諡號 敏達의 孫子이며 百濟王族이다”라는 明文이 있다.. 이것은 부연할 것도 없이 제30대 敏達천황이 百濟王族이라는 史實을 밝혀주는 일본 역사 記事이다. [日本書紀]에서는 敏達천황의 生父는 다름아닌 欽明천황이다.
『新撰姓氏錄』은 桓武천황의 제5왕자였던 万多親王(788~830) 등이 서기 815년(嵯峨天皇, 809~823 재위 당시)에 완성한 王室本이다. “大原眞人”의 “眞人”이라는 것은 王姓이며 天武 천황(673~686)13년초에 제정된 “八色의 姓”에서 제1위의 王姓이며, 日本 王族에게만 주어진 姓氏이다. 따라서 大原眞人인 그 사람 自體가 日本 王族인 동시에 百濟 王族임을 쉽게 알 수 있다.
『新撰姓氏錄』에 대한 書誌學的 硏究는 이른바 大著로 평가되는 佐伯有淸 교수의 『新撰姓氏錄硏究』가 지금까지 가장 권위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佐伯有淸 씨는 이 책을 桓武천황이 왕자 万多親王에게 편찬토록 한 가장 큰 목적은 “律令體制 動搖의 한 防止策이었다”고 한다. 즉 王室에서 법률과 법령을 정하여 王權의 흔들림없는 유지를 위한 왕․귀족들의 신분확립에 역점을 두었던 것을 말한다.
律令體制란, 律令과 格式식등 국가의 기본 法典을 가진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가리킨다. “律”은 형벌을 규정한 法이고, “令”은 백성을 다스리는 敎令法이다. 격식은 율령의 단순한 부속법이 아닌 자립성을 가지고 현실에 기능하는 법을 가리킨다.
“格”은 弘仁格(820)․貞觀格(806)․延喜格(907)이 편찬되어 행정․사법의 典據가 되었으며 이 셋을 集成한 것이 ‘類棸三代格’이다.
“式”은 율령시대의 법전이며, 일반적으로는 율령 및 格의 시행세칙이나 格과 똑같은 기능을 갖는 경우도 있었다. 弘仁式(820)․貞觀式(871)이 편찬되었으며 이 둘을 集成한 것이 延喜式(927)으로 현재 50권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律令體制 동요의 방지책으로 『新撰姓氏錄』이 다른 어떤 왕도 아닌 桓武천황의 勅令에 의해서 편찬하게 된 배경과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니 라 桓武천황의 韓日同族 관계 서적의 焚書事件이 아닌가 한다. 즉 백제왕족인 光仁천황과 백제왕족 和新笠황태후를 부모로 하여 태어난 桓武천황 시대의 焚書는 다름 아니고,
“옛날에 일본은 三韓과 同種이었느니라고 하는 책이 있어서, 그 책을 桓武천황 御代에 불태워버렸도다”는 것을 北帛親房(1293~1354)가 밝힌 바 있다. 桓武천황은 그 당시 일본 각지의 官家에 대해 韓日同種 관계의 모든 책자들을 분서시켰다.
이 엄청난 역사 기록은 그 당시 嵯峨천황의 詔勅에 의해 弘仁年間(810~823)에 씌여진 일본사 최초의 講書로서 지금까지 그 필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것만을 보더라도 桓武천황 이래로 日本王室이 “百濟血統”이라는 데서 “야요이시대”(BC․3~AD․3) 以前부터의 日本列島에 살아 온 先住民들의 反抗이 각지에서 적지아니 발생했던 것을 쉽게 살피게 한다. 實在로 桓武천황이 두 번씩이나 遷都하며, 平安京(京都)에 옮겨와서야 마침내 자리가 굳건히 잡히기 시작했다. 그후 그의 아들代에 이르러서야 겨우 『新撰姓氏錄』이 완성되는 등, 律令制度 强化에 힘쓰면서 古代로부터의 先住民들의 크고 작은 抵抗을 百濟人王室이 强力하게 탄압했음도 살피게 해 준다.
그러기에 先住民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新撰姓氏錄』에는 韓日王室의 혈통이 百濟왕실로부터 비롯된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한 것이 제30대 敏達天皇의 百濟王族 記事이다.
그뿐아니라 『貞觀式』이며 『延喜式』에 이르면 이 王室法度에서는 百濟神, 新羅神 伽倻神에 대한 王室의 祭祀 儀式이 堂堂하게 明文化되어 있다는 史實에 우리는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게 된다. 卽 그것은 「神祇」第一에 「宮內省坐神三座, 月次祭 新嘗祭, 園神社, 韓神社二座」이다.
여기서 말하는 月次祭는 日本國家의 安寧을 祈念하여 每月 제사를 하는 것이며, 新嘗祭는 해마다 12월23일에 年次로 거행하는 日本王室의 가장 큰 國家祭祀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日本王室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세분의 韓國神에게 이와같은 거창한 祭祀儀式을 거행하는 것인지는 不問可知라 하겠다.
(3) 押坂彦人大兄皇子는 敏達천황의 왕자이며, (4)舒明천황의 生父이다.
(4) 舒明천황은 『일본서기』에 상세한 기사가 말해주듯이 敏達달황의 孫子이다. 敏達천황이 日本 역사상 最初로 百濟大井宮(현재의 行政地名 조차도 “百濟”이다. 즉 奈良縣北葛城郡廣陵町百濟)을 지었으며, 그의 親孫子인 舒明천황도 祖父인 敏達천황의 뒤를 이어 그 自身도 역시 “百濟宮과 百濟大寺를 百濟川옆에 지었다”는 것이 『日本書紀』에 밝혀져 있다. 이 기사에 따르자면, 舒明천황11(639)년 7월에 “百濟川側爲宮處.是以.,西民造宮, 東民作寺. 是月(12월),於百濟川側,建九重塔.十二年十一月,徙於百濟宮.十三年十月,天皇崩于百濟宮. 殯於宮北.是爲百濟大殯”이라 고 明示되어 있다.
이 記事에서 말하는 “百濟川”은 지금의 奈良縣北葛城郡廣陵町百濟 지역을 흐르는 현재의 강이름이 “曾我川”이며, 日帝 때에 “百濟川”이라는 강이름을 바꿨다.
“百濟大殯”이란 百濟王室의 “三年喪 葬禮儀式”이다. 즉 國王이 서거했을 때에 王宮의 北쪽에다 殯宮을 설치하여 假墓를 만들고, 3년째되는 해에 正式으로 王陵을 만들어 安葬한다. [日本書紀]에 보면 實際로 舒明천황이 서기 641년 10월9일에 서거한지 3년만인 서기 643년 9월6일에, 舒明천황의 신체를 押坂陵(지금의 櫻井市 大字忍坂字段の塚)에 安葬했다고 썼다.
또한 實際로 本國 百濟에서의 百濟大殯의 實例가 考證되는 것은 지금의 公州땅 武寧王陵에서 발굴(1971년7월)된 武寧王의 ‘墓誌石’이다. 여기에는 “斯麻王(무령왕의 이름)이 62세 되는 癸卯年(523) 5월30일에 서거했다. 乙巳年(525) 8월 12일에 大墓(현재의 무령왕릉)에 안장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그 당시 百濟 系列의 倭王室에서도 王이 서거하면 “百濟大殯” 三年喪을 지냈던 것을 입증하거니와, 그와 같이 倭王室에서 倭國王의 葬禮를 “百濟大殯” 三年喪으로 3년 동안의 國葬을 치룬 그 史實 하나만 살피더라도 모름지기 그 時代의 倭國이 百濟의 植民地였음을 示唆한다고 보아 결코 무리한 견해는 아닐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더 중요한 史實을 지적해 둔다. 『扶桑略記』에 의하면 舒明천황이 서거한 다음 해인 서기 642년 2월, “壬寅二月 百濟使來朝 弔先帝之喪”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日本書 紀 ]에는 이와 같은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百濟王室의 使臣이 倭王室에 찾아가서 “先帝의 喪을 弔問했다”고 하는 것은, 그 당시 倭의 百濟系王인 舒明천황이 百濟王室의 義慈王(641~660재위)보다 王室 家系上 그 序列이 윗대라는 뜻이다. 백제 義慈王은 舒明천황의 왕자인 天智천황(661~667 재위)과 사촌형제간이다. 즉 서거한 舒明천황과 義慈王은 숙질간이다. 따라서 백제왕실에서 건너간 義慈王의 弔問使는 ‘先帝의 喪’ 을 조문했던 것이다. 卽 舒明천황은 義慈王의 父王인 武王(600~641)과 사촌형제간이다.
『新撰姓氏錄』 연구의 최고 권위학자로 정평있는 佐伯有淸씨는, “舒明천황은 在位 당시에 百濟天皇으로 호칭되었을 것이다”고 지적한 바 있다는 것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5) 天智지천황은 660년 百濟가 망한 뒤인 663년 8월에 日本땅으로부터 母國인 百濟 救援을 위해 日本 王室에서 살고 있었던 百濟의 豊璋王子와 함께 5천여명의 日本軍 兵士들을 百濟땅의 白村江으로 보냈으나 전멸 당했다. 당시 모두 27,000명의 일본군이 百濟로 원정했다가 패전하고, 그들은 9월에 百濟遺民들과 함께 日本땅으로 돌아왔다.
665년, 天智천황은 日本으로 건너 온 百濟 遺民 400여명을 近江(神崎)땅에 살도록 土地와 住宅까지 모두 마련해주었는가 하면, 667년 3월에는 天智천황 스스로가 百濟 遺民들에게 새 터전을 마련해준 近江땅에 스스로 遷都(大津宮)한 것)을 필자는 주목한다. 왜냐하면,
“王都를 近江에 옮겼다. 이때 天下의 百姓들은 遷都를 원치 않는다고 하면서, 비웃고 비판하는 자가 많았다. 얄궃은 풍자의 노래(童謠)가 널리 퍼졌다. 낮이나 밤이나 여러 곳에서 火災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것은 일본 先主民들이 天智천황의 百濟 遺民들에게 대한 지극한 우대에서 야기된 커다란 不滿의 폭발이 아닌가 추찰된다. 왜냐하면 天智천황은 近江에로 遷都 직전인 666년11월, 겨울철에도 百濟에서 건너 온 遺民들인,
“百濟人 남녀 2천여명을 東國에서 살도록 자리를 잡아주었다. 百濟人들에 대하여는 僧俗을 따지지 않고 3년동안이나 國費로서 食糧을 베풀어 주었다.”는 사실에서이다.
天智천황의 百濟 遺民들에 대한 이와같은 끔찍한 特別 優待政策은 그의 오랜 母國에 대한 철두철미한 애정과 日本에서의 百濟系 倭王室의 든든한 維持策이었음을 추찰케도 한다. 天智천황의 遷都와 百濟 遺民 優待에 관한 그동안의 日本 古代史學者들의 定說은 天智천황이 오랜 百濟系 倭王室의 터전인 奈良땅 “飛鳥의 舊勢力들의 파워를 避하여 人心을 一新한다”는 데에 있었다고 한다.
(6) 施基皇子는 天智천황의 王子이다.
(7) 光仁천황(770~781재위)은 施基皇子의 제6王子이다. 백제 武寧王의 직계 後孫으로서 日本王室에서 벼슬하던 和乙繼(8c)라는 “百濟朝臣”의 딸 和新笠(생년미상~789) 과 光仁천황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왕자가 桓武천황이며, 둘째왕자는 早良親王이다. 例의 『袋草子』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바로 “白壁王(光仁천황)”이다.
(8) 桓武천황(781~806 재위)은 서기781년에 즉위하자 그 해 11월 19일에, 「田村後宮의 今木大神(今木 神)을 從四位上에 敍했다」. 이 田村後宮이란 奈良시대(710~784)의 日本王室에서 品階 正一位의 최고위 朝臣을 지낸 藤原仲麻呂(706~764)가 居住했던 奈良땅의 저택이다. 바로 그가 王位에 登極시킨 제47대 淳仁천황(758~764재위)이 皇太子가 되기 이전까지 이 저택에서 데리고 함께 살았으며, 제46대 孝謙천황(749~758재위)도 한때 이 저택에 살았기 때문에 이 저택을 존칭하여 이른바 왕궁으로서의 田村宮 또는 田村後宮으로 부르게 되었다. 즉 今木神인 百濟 聖王의 祠堂으로서의 宮이 되었던 것이다.
孝謙천황은 女王이며 제 45대 聖武천황(724~749재위)의 第二公主이다. 아버지 聖武천황이 몸소 백제인 行基스님(당시 일본 최고위의 大僧正)에게서 머리를 깎고 가출하므로써 父王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여왕이다. 孝謙女王의 이름은 高野姬尊이며, 따라서 이 여왕을 高野천황으로도 부른다.뒷날 和新笠皇太后의 姓氏인 和氏를 高野氏로 改姓한 까닭은 聖王을 모셨던 田村宮의 高野姬尊과 百濟 聖王과의 血緣관계를 추찰케 한다. 그것은 곧 高野씨도 일본왕실의 백제계 公主라는 것이 입증된다고 推察하고 싶다..
거듭 지적하자면 田村宮에다 神位로서 모신 今木大神은 백제의 聖王이다. 滋賀文敎短大 사학교수 宇治谷 孟(1918~ ) 씨는,

“今木大神의 今木은 今來(지금 왔음)로서, 渡來系의 神신으로서 생각된다. 백제왕족인 桓武천황의 어머니 高野(和)新笠皇太后가 祭祀를 모셨기에 今木大神을 田村後宮에다 모시고 제사지내게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뒷날의 平野神社(京都市北區)에서는 今木神,久度 神,古開神,比賣神의 4좌를 모시고 제사지낸다.”고 밝혔다.

여기서도 今木大神이 渡來系인 百濟 聖王이라는 史實이 지적되고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화신립황태후만이 田村後宮에서 聖王에 대한 제사를 모셨다고 추측하려는 宇治谷 孟씨의 推測은 납득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서기781년에 桓武天皇이 登極하기 以前에 日本王室에서 田村後宮 에다 도저히 和新笠皇太后 한사람만을 위해 聖王의 祠堂을 마련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桓武천황은 登極하기 전까지는 王室 勢力들의 얽히고 설킨 권력다툼 속에서 일개 無力하기 그지없는 명실뿐인 王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桓武천황이 자신의 生母 和新笠夫人에게 “皇太后”로서 王室 尊稱을 정한 것은 그가 卽位한 이후의 일일 따름이라는 점을 유의할 일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百濟 聖王의 死後의 神名을 日本 王室에서 거창하게 “今木大神”이라는 최고의 敬稱으로 떠받들면서, 그 당시의 王都 奈良땅의 田村後宮에서 祭祀모셔 왔다는 史實은 과연 무엇을 적극적으로 示唆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 역사에서 소위 “大神”으로 尊稱한 神은 開國神이라는 天照大神 이후 百濟 “聖王”의 “今木大神”이 유일한 尊稱이라는 사실을 환기하고 싶다.
그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감안할 때 百濟 聖王의 일본내에서의 位相은 결코 우리가 쉽사리 논하기 어려운 중대한 역사적 발자취가 담겨 있으리라고 看做하련다. 그것은 聖王의 日本에 대한 佛敎 布敎라고하는 次元을 초월하는 더욱 중대한 직접적인 정치적 權力의 發動동을 고려함직하다고 보고싶다.
우선 여기서, “百濟 聖王은 일본에 건너와서 欽明천황이 되었다”고 하는 일본의 古代史 學者 小林惠子(1936~ )씨의 연구 내용부터 간략하게 소개키로 한다.
“聖王18(540)년에 고구려의 牛山城을 공격하다 패한 聖王은 곧장 倭國으로 亡命했다. 그때부터 그는 倭國의 金刺宮에다 새로운 居處를 定정하고 倭國王이 된 것이 아닌가. 따라서 『日本書紀』에서는 聖王이 日本에 亡命한 540년이 欽明 元年이 되는 셈이다. 聖王이 南朝인 粱나라로부터 佛敎를 받아들여, 그것을 倭國에 전했다는 것은 유명한데, 이 시대의 梁나라는 百濟와 倭國이 함께 친밀한 관계였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日本書紀』에는 宣化천황은 繼體천황의 第二子로 되어 있고, 그가 宣化4(539)년 2월에 죽었다고 되어 있으나, 事實上 그가 죽은 것인가. 그렇다면 이듬 해(540년) 倭國에 入國하여 倭國王인 欽明天皇이 되는 聖王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상황이 좋은 것은 아닌가. 단 聖王은 日本에 건너 왔다하여도 本國의 百濟王을 포기한 것이 아니며, 이른바 百濟國王과 倭國王을 兼任하고 있었던 것이다.”
筆者도 百濟의 聖王이 倭國의 欽明天皇과 同一 人物이라는데는 全的으로 同意하고 있다. 그러나 聖王이 倭國땅에 직접 건너가서 現地의 倭國王 王位를 兼任하기 始作한 時期는 서기 540년이 아닌 서기 531년으로 보고 있다. 卽 서기 531년 2월7일에 聖王의 叔父인 繼体天皇이 향년 82세를 一期로 서거했기 때문에 서둘러 그의 王位를 계승하기 위해 倭國땅으로 건너갔던 것이다.繼体天皇은 百濟 제24대 東城王(479~501재위)의 第二王子였다. 東城成王은 百濟 제23대 三斤王(477~479, 제22대 文周王 의 太子)이 서거하자, 그동안 살고 있던 일본땅에서 백제로 귀국하여 百濟 王位에 올랐다는 것이 『日本書紀』(雄略23年 4月條나)에 기사가 보인다.
東城王(雄略天皇 당시의 倭王室에서는 “昆支王子의 第五王子 末多王”이라 칭호됨)은 文周王의 친동생으로서, 倭王室에 건너가 아버지인 昆支王子(應神天皇) 밑에서 살고 있다가 뒷날인 雄略天皇 시대에 百濟로 歸國하여 東城王으로서 왕좌에 올랐다.
“倭王室에서 雄略天皇의 지극한 총애를 바으며 왕실의 末多王으로 호칭받던 東成王의 百濟에로의 歸國길에는 築紫의 兵士 五百名의 護送을 받았다.”
바로 이와같은 史實에서도 능히 지난날 倭王室에서의 昆支王子(應神天皇 당시)의 偉容을 推察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한가지 지적해 두어야할 중대한 사항은 “昆支王子는 蓋鹵王의 동생이다.”라는 虛僞 記事이다. 이것은 매우 악의적인 日本의 역사왜곡이다. 왜냐하면 “昆支王子는 蓋鹵王의 王子이다.”라는 것은 엄연한 史實이다.
倭나라에서 百濟로 건너와 王位에 오른 東城王을 『日本書紀』에서는 彦主人王(ひこうしのおおきみ)로도 불렀으며, 『上宮記逸文』에서는 圩斯王(うしのおおきみ)로 쓰고 있다. 즉 큰소왕인 “牛大王”이다. 圩斯‘(うし、牛, 소)’라는 漢字 表記의 萬葉假名이다. 또한 『百濟本記』에서는 東城王의 이름은 牟大, 즉 ‘소울 모’(牟)와 큰 대(大) 즉 “크게 우는 소”로 쓰고 있다. 日本 史書의 彦主人王 또는 圩斯王은 어느 것이나 ‘소’(牛)를 일컫는 이두식(만엽가명) “牛大王”의 表記法이다. 이와 같이 韓日 古代史料 어느 것에서나 한결같이 百濟 東城王을 “소”(牛)와 연관지어 “큰소왕”의 王號를 呼稱해 온 것이 매우 주목되기도 한다.
聖王은 서기 538년에는 佛敎를 倭國에 전했는데, 이미 그보다 앞서서 聖王은 서기 531년에 倭國에 건너가 倭王의 王位를 兼任하고 있은지 8년째 되던 해이다. 그러나 『日本書紀』는,
“서기 552년 10월에 百濟 聖明王이 達率 怒唎斯致契를 倭에 派遣하여 佛像과 佛經 등을 傳해왔다.”고 내세우고 있다.
日本의 權威 史學者들의 통설은 “百濟 聖明王은 서기 538년에 倭에 불교를 布敎했다. 서기 552년에 포교했다는 것은 잘못이다”고 그들은日本 古代 佛敎文獻들로서 考證했다.
여기서 지적해 두고 싶은 중요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日本書紀』에서는 欽明天皇을 서기 539년에 卽位한 것으로 쓰고 있는 점이다. 卽 이것은 百濟 佛敎가 聖王에 의해서 欽明天皇 當時인 서기 538년에 일본으로 포교된 事實을 意圖的으로 否定하기 위한 역사왜곡이다. 앞에서 이미 밝혔듯이 百濟 聖王이 兼任하여 倭國의 欽明天皇으로도 同時에 卽位한 것은 이미 서기 531년이기 때문이다(前揭[上宮聖德法王帝說]).다만 여기서 밝혀둘 것은 서기532년부터 “欽明一年”의 年 記가 始作된다(前揭[日本史年表]). 따라서 百濟 聖王이 倭王 을 兼任한 歷史 記事上의 年度는 서기532년이 된다. 또하나의 參考事項을 적어두자면 바로 이해인 서기 532년에 金官伽倻國 金仇亥王이 新羅에 投降했다. 金仇亥는 金 庾 信 의 曾祖父이다. [日本書紀]에 따르자면 그동안 百濟는 倭國(百濟系의 繼体天皇 時代 以來)과 더부러 伽倻를 차지하려는데 힘을 기우려 왔다. 여기에 다음 論據도 참고하련다. 卽 “伽倻에는 일찍부터 百濟와 倭의 勢力이 壓迫을 加해 왔다”. 伽倻聯盟이 完全히 新羅에 倂合된 것은 서기562년이며, 그 당시 倭國은 聖王의 治下였다. [日本書紀]에 準한다면 聖王(欽明 天皇)이 逝去한 것은 서기 571년4월이다. 여기서 또한 크게 주목하자면 그해 4월15일에 聖王(欽明天皇)은 病席에서 第二王子인 太子(敏達 天皇)를 급히 불러 遺言했다.

“寡人은 重病이다. 後嗣는 네게 맡긴다. 너는 新羅를 쳐 任那(伽倻)를 차지하여라.”

聖王은 그가 倭國의 欽明天皇으로도 在位중인지 6년만인 서기 538년에 自己 自身의 母國 百濟로부터 佛敎를 몸소 倭땅의 스스로의 王室로 傳播시킨 것이었다고 본다.

『百濟本記』에 의하면 百濟 聖王은 몸소 서기 554년 7월에 新羅의 狗川땅을 습격했으나 失敗하여 戰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때문에 聖王의 長男인 餘昌이 百濟 제27대 威德王(554~598)으로 登極한 것으로 쓰여있다. 그러나 聖王은 그 당시 戰死한 것이 아니며, 그는 본격적으로 倭國을 專擔 統治하기 위해, 意圖的으로 戰死한 것으로 僞裝하고 일단 長男 餘昌을 “威德王으로 繼承시키고, 이미 그가 統治하고 있던 倭國의 奈良 百濟人땅의 “金刺宮” 으로 完全히 떠나간 것이었다. 聖王은 王宮인 金刺宮에서 欽明天皇으로 살았고, 聖王(欽明天皇)을 계승한 제30대 敏達천황(572~585)은 『日本書紀』에,

“敏達천황은 欽明天皇의 第二子이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欽明天皇의 第一子가 “누구”인지 日本의 어느 史書에도 전혀 그 관련 記事는 없다. 모름지기 聖王(欽明天皇)의 第一子자는 百濟 제27대 威德王인 餘昌이 아닌가 한다. 이것을 立證해 주는 것이 일본 法隆寺 古文書인 『聖譽抄』이다. 이 古文書에 明記된 기록에 따르면 百濟 威德王의 卽位는 欽明 15(554)년에서 18(557)년 사이 4년간의 어느 한 시기로 되어 있다.
또한 『日本書紀』에서는 欽明15(554)년 12월에 聖明王이 戰死했으며, 이듬 해인 “十六年 春二月 百濟王子餘昌,遣王子惠,王子惠者威德王之弟也”로 써있다. 卽 서기556년에 백제왕자 餘昌이 倭國으로, 동생인 惠王子를 파견했다고 했다. 그것이 事實이라면 聖王이 逝去한 그 이듬해에도 餘昌王子는 아직 登極하지 않은채, 동생인 王子惠를 倭國 王室로 파견했다는 것이다.
『日本書紀』에서는 서기557년인 欽明“十八年春三月庚子朔,百濟王子餘昌嗣立.是爲威德王”이라 쓰고 있다. 즉 聖王이 서거한지 4년째에 비로소 威德王이 王位를 계승했다는 것. 여기서 百濟 聖王은 그동안 倭國의 金刺宮에 있으면서 惠王子를 倭國으로 불러드리고 있었다는 史實을 다음과 같은 『日本書紀』의 중대한 記事로서 살필 수 있다.
卽 “서기 556년 1월에 惠王子가 百濟로 귀국하게 되자 阿倍臣 등 朝臣들이 거느리는 勇士 1천명이 惠王子를 호위하여 百濟로 돌아가게 해주었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일개 百濟王子의 귀국 길에 1백명도 아닌 1천명이나 되는 엄청난 수효의 용사들의 護衛軍을 충당시킨 것일까.
百濟 聖王(欽明천황)이 倭國의 國王이었다는 것은 이 한가지 記事만으로도 推察할 수 있지 않을까. 이 惠王子는 뒷날 親兄인 威德王을 계승한 백제 제 28대 惠王(598~599 재위)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또다른 중요한 『日本書紀』의 記事도 주목하고 싶다. 그것은 聖王이 戰死했다는 554년 1월 7일 “皇太子”(뒷날의 敏達 天皇)를 冊封했다는 史實이다.
앞에서 論及한대로 이 人物이 『新撰姓氏錄』에서 百濟王族으로 입증된 것이며 그는 百濟聖王의 第二王子로 看做된다. 聖王의 第一王子는 百濟 威德王이며 또한 第三王子는 聖王이 金刺宮에 2년동안 데리고 있다가 556년에 1천명 勇士들의 엄중한 護衛로 百濟로 歸國시킨 惠王子이다.

多角的인 考察로서의 同一人物

이상의 『日本書紀』 등의 記事로서 추찰할 수 있는 것은, 百濟 聖王은 倭國의 欽明天皇을 兼任 在位하면서 서기554년에 完全히 倭國땅으로 건너간 뒤에도 다시 4년이 지난 “서기557년에 이르러서야 第一王子 餘昌을 百濟 第二十七代 威德王으로 계승”시키는 등, 약4년간의 本國 百濟의 王位 空白기간을 두었덨 것이 주목된다.
그와 같은 日本 史書들의 “威德王의 서기557년 百濟王 登極說”은 그 可能性이 『百濟本記』의 威德王條에서도 능히 推察된다. 왜냐하면 『百濟本記』에는 威德王이 “서기554년에 卽位했다”는 단수한 기사만이 써있을 뿐이며, 그해 “10월 百濟 熊川城으로 高句麗 大軍이 쳐들어 왔으나 敗退했다”고 했을 따름이다. 卽 威德王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어서 서기555년부터 서기559년까지 5년간의 威德王 관계 歷史 記事는 완전히 空白 상태이다. 이로 미루어 威德王의 서기557년 登極說은 可能하다고 본다.
여기서 또다른 한가지 重要한 共通点에 관한 것도 此際에 指摘해두고 싶다. 그것은 이미 살펴왔드시 百濟의 聖王을 日本 歷史에서는 그의 “王名”에다 “明”字를 一字 더 添加시켜 “聖明王”으로 쓰고 있는 것과, 또한 倭의 “欽明天皇”의 이름에도 역시 “明”字가 한 글자 들어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로 간주할 수 없다고 본다. “平野明神” 역시 同一하다.
또 한가지 指摘해둘 重要한 事項이 있다. 그것은 日本에서의 天皇號의 稱號는 서기670년 以後의 일이었다. 따라서 韓日間의 王號의 混同을 避하고자 不得已 日本史書에 準하여 “原則的인 倭國의 欽明王” 등의 王號 表記를 “天皇”號로서만 따라 썼음을 밝혀둔다.
앞에서 『日本書紀』를 인용하여 지적했드시, 敏達天皇이 최초로 倭의 奈良땅의 “百濟”라는 公式的인 行政地名의 땅에서 “百濟大井宮”을 지었다는 것, 또한 敏達天皇의 親孫子인 舒明天皇 역시 “百濟”땅에다 “百濟大宮” 등을 “百濟川” 지역 東西의 百姓들로 하여금 건설시켰다는 史實은도 결코看過할 수 없다고 본다.

거듭 밝히거니와 敏達天皇이 “百濟王族”이라는 것 등의 考證은 곧, 敏達天皇의 生父로 [日本書紀]에 記事化되어 있는 欽明天皇이 곧 百濟 聖王과 同一 人物일 可能性을 누구도 쉽사리 否定할 수 없다는 史實을 구체적으로 살피게 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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